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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그림

'빛과 어둠의 마술사' 렘브란트의 불운이 끊이지 않았던 삶

by 오늘큐 2023.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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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의 마술사'로 불리는 렘브란트는 17세기 네덜란드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유럽 미술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렘브라트는 강렬한 명암 대비를 통해 극적인 화면을 만드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을 능숙하게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법은 인물 묘사에도 탁월했으며 렘브라트도 점차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렘브라트가 가장 성공적인 시기를 보냈던 때는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라는 집단 초상화를 그린 이후입니다. 

The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 (1632)

 

이와 비슷한 주제의 집단초상화는 이전에도 그려진 적 있지만, 렘브란트의 작품처럼 인물들의 극적인 표정과 배치를 담은 작품은 없었습니다. 이 그림이 호평을 얻은 덕분에 렘브란트는 가장 성공적인 시기를 보냈으며, 이후 명문가의 딸인 사스키아 반 아윌렌부르흐와 결혼했습니다. 아내의 인맥과 거액의 지참금을 통해 렘브란트는 활동무대를 더욱 넓힐 수 있었습니다. 거액의 밑천을 토대로 그림 투기에 뛰어들기도 했고, 더 나아가 거액의 돈을 투자해 그림과 골동품을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이후에 렘브란트가 불운한 말년을 지내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아내 사스키아가 결핵으로 사망하며, 렘브란트에게도 본격적인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1642년에 완성된 '야경'이라는 작품이 그의 몰락의 계기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Night Watch, Militia Company of District II under the Command of Captain Frans Banninck Cocq (1642)

이 그림은 암스테르담 자경단협회의 의뢰로 그린 집단초상화입니다. 하지만 명암 효과와 대담한 구성으로 당시 혹평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초상화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인물은 주인공처럼, 어느 인물은 배경처럼 묘사되었기 때문이죠.

 

화가로써의 명성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지만, 1652년 영국-네덜란드 전쟁으로 네덜란드 경제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미술 시장이 심각한 타격을 받자 거액의 빚더미에 오르게 됐습니다. 그래도 렘브란트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그를 헌식적으로 도운 하녀 헨드리키에 스토펄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상황은 갈수록 어려워져 1656년에는 파산선고를 받고, 저택과 미술품마저도 전부 팔아야 했다. 하지만 헨드리키에도 페스트로 사망하였으며, 아들 티투스 마저 세상을 떠나며 렘브란트는 완전히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The Mill (1645-1648)
Titus, the Artist’s Son (c. 1657)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8)

브란트는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도 유명합니다. 무려 100여점에 달한다고 하는데요. 렘브란트의 자화상에는 희로애락이 담겨 있으며, 말년에 가까워질수록 어딘가 침울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Rembrandt Laughing (1628)
Self-Portrait (1660)
Self-Portrait (1669)

빛과 어둠을 자유자재 구사해 '빛과 어둠의 마술사'로 불린 렘브란트의 인생은 결코 빛만 가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도 그의 작품처럼 빛과 어둠을 모두 가고 있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최고의 거장이라고 불리며 서양 미술사의 중요한 한 획을 그은 렘브란트. 그는 사후 자신이 이렇게 높이 평가받게 될지 알았을까요?


 

Rembrandt(1606-1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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